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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기고] [매일노동뉴스] [흐르는 '세월', 다시 사월]


[기고] [매일노동뉴스] 흐르는 '세월', 다시 사월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류민 정책기획팀장


언젠가 모어가 아닌 어느 말을 배울 때의 일이다. 작문수업 숙제로 ‘나는 기억한다’로 시작하는 스무 개의 문장을 만들어 적어야 했다.
그 숙제는 무척 귀찮고도 꽤나 흥미로운 과정이어서,
기억과 그 기억들 사이의 질문들을 다시 마주하는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 대체로 묘한 균형이 있었다.

그날 이후 때때로 같은 숙제를 스스로 해보고는 한다.
어느 때에는 첫 문장으로 어린 시절 늦잠을 자고 일어나 챙겨 보던 일요일 오후 TV 프로그램의 에피소드에 대해 적어 뒀다.
어느 날에는 스무 살, 철도파업 현장에서 받았던 붉은 머리띠의 촉감에 대해서 적었다.
그해 봄에 나는 ‘투쟁’이라 적힌 그 붉은 띠를 한 달 즈음 가방 한켠에 매어 두고 다녔는데,
끝내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기억하기 어려웠다. 내가 버린 것인지, 그저 잃은 것인지.

며칠 전 한밤, 오랜만에 숙제를 해 봤다.
‘잔인한 사월’의 어귀에서 기억의 문장들은 대체로 유지했던 즐거움과 고통 사이의 묘한 균형을 잃고, 서러운 감각들로 내달렸다.
그 밤의 문장들은 개인의 기억들을 넘어, 사회적 기억을 향하는 집단적 경험들과 닿아 있다.
3일의 제주를, 16일의 세월호를, 19일의 시민들을, 28일에는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세계의 노동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고 적었다.

다음주 금요일(16일), 어느덧 세월호 참사 7주기를 앞에 두고 있다.
7년 전 그날, 가라앉는 배를 우리는 모두 봤다. 299명이 숨을 거뒀고, 5명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유족과 시민들은 그 비극과 무력의 고통에 대해 다만 절망으로 답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기억’과 ‘약속’은, 사회적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고,
인간의 존엄보다 이윤을 앞에 두는 사회의 질서에 물음을 던지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광장의 촛불로 정치권력의 책임을 물었고, 참사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숱한 노력을 이어 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 등 시민과 노동자 모두의 안전한 일과 삶을 위해 함께 거리에 섰다.

세월호의 기억은 다만, 비극에 대한 절망 혹은 연민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안전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환기하는 실천의 경험과 맞닿으며
새로운 사회적 기억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촛불의 힘으로 출발한 새로운 권력은 그 시민들의 ‘기억’과 ‘약속’ 모두를 손쉽게 배신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의 임기는 이제 겨우 1년 남짓 남아있다.
유족들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하면서 하나둘 진실의 조각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지만,
여전히 그 전체를 꿰어 낼 수는 없었다.

지난 1월, 세월호 참사 검찰 특별수사단이 발표한 재수사 결과는 17개의 혐의 중 오직 2건만을 기소하면서,
책임자들에게 또 다시 면죄부를 줬다.
2014년 참사 직후 검찰 부실 수사 책임자들은 문재인 정권하에서 요직을 맡아 여전히 안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여 참사 이후 7년, 여전히 유족과 시민들은 머리칼을 깎아 내고, 곡기를 끊고 청와대 앞에, 어느 광장의 복판에 서 있다.
하여 기억하는 우리들의 오늘에 ‘세월’은 살아서 내내 흐른다.
다시 사월, 우리는 함께 기억한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함께 거리에 있다.
우리의 기억과 실천이, 저들의 망각과 배신을 끝내 이길 것을 믿는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